묵상글

가톨릭신자의 용서에 대한 묵상 (마태오 18:22)

자유롭게 생각하고 평화를 이야기 합니다. 2025. 8. 1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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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과 바다와 같은 너른 마음을 배워 나가자,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탤런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어째 익숙하다.

2014년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하여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미사를 집전하시고 아마도 한국을 떠나시기 전날 명동성당에서 하신 강론에서 언급하신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는 문구가 생각이 나는 구절이다.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 단락을 490번으로 해석하는 모양인데 종교학자들은 77번이나 490번이나 해석의 차이일 뿐 큰 의미는 없다고 한다.

 

어쨌든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77번을 용서할 자신이 있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오늘 복음말씀을 찬찬히 다시 읽어 보니

주님의 말씀과 당부가 타당하다고 생각이 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한 대목에서부터 뭔가 모순이 느껴졌다.

 

나에게 죄를 지은 자 (마태오 18:21)라고 말하는데 

나에게 상처를 준 자에게 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나에게 죄를 지은 자라는 말은 선뜻 동의가 안 된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베드로의 일반적인 생각을 아시고

일흔일곱 번을 용서해 주라는 당부의 말씀과 함께 예시를 보여주신다.

 

일만 탤런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굳이 시세를 반영하자면

일만 탤런트는 30조이고 백 데나리온은 5백만 원 정도라 한다.

 

30조의 빚을 탕감받은 자가  5백만 원의 빚진 자를 용서 못하는 게

인간의 욕심이고 한계이다.

 

우리가 없는 것을 자꾸만 시선을 주면 정작 자신이 가진

귀한 것은 응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걷고 물 한잔 마시고 기지개를 켠 다고 했을 때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물을 안 길러오고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움직이는 건강한 몸을 주셔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들어야 정상인데

우리는 항상 잊고 산다.

 

평범한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용서를 하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판단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 주는 마음을 가지면 어떨까 싶다.

 

우리는 살면서 남에게 준 상처는 잊고 (물론 악의적이든 미처 예상 못한 것이든 간에)

우리가 받은 상처는 크게 기억하는 습성 역시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시처럼

내가 저지른 30조 원 가치의 죄는 잊거나 무시하고

내가 느낀 5백만 원의 피해는 커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는 모두 같은 죄인이다.

 

내가 편하시려면 그 판단을 빠르게 주님께 맡기고

나는 그 시간에 좀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일을 하면 어떨까?

 

법륜스님의 말씀에도 

뜨거운 찻잔을 들고 스님 뜨거워요 어떻게 하나요.라고 묻는데

그냥 놓으면 돼요.라고 하는 말이 생각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주님의 판단에 맡겨 드리는 것.

 

그것은 

 

내가 편하게 살려면 응당 해야 할 행동이고

나 역시도 상처를 주는 사람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고

그러하니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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